디지털 격차라는 말은 흔히 기술에 대한 이해도나 개인의 적응력 차이를 떠올리게 한다. 새로운 기기를 잘 다루지 못하거나, 최신 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디지털 격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술 자체보다 그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고 제공되는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같은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누구에게는 편리하고 누구에게는 장벽이 되는 이유는 설계의 기준과 방향에 있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격차가 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인지 구조적으로 살펴본다.

1.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설계는 그렇지 않다
디지털 격차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기술과 설계의 차이다. 기술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 비교적 중립적인 성격을 가진다. 인터넷, 스마트폰, 앱 같은 기술 자체는 특정 집단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술을 어떤 사용자를 기준으로, 어떤 상황을 가정하며 설계하느냐에 있다.
디지털 서비스는 대부분 평균적인 사용자를 상정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평균은 실제 사회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설계 과정에서 기준이 되는 사용자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빠른 정보 처리와 직관적 조작에 부담이 없는 집단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기준은 자연스럽게 특정 연령대와 생활 환경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에 두게 된다.
그 결과 같은 기술이라도 설계 방식에 따라 체감 난이도는 크게 달라진다. 버튼의 위치, 용어 선택, 화면 전환 방식, 오류 처리 구조 등은 모두 설계자의 판단이 반영된 요소다. 이러한 요소들이 특정 사용자에게는 자연스럽지만, 다른 사용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벽이 된다. 디지털 격차는 이처럼 기술이 아니라 설계가 만들어낸 차이에서 시작된다.
2. 효율 중심 설계가 만든 보이지 않는 배제
디지털 격차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라는 점은 효율 중심 설계가 만들어낸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디지털 서비스는 빠른 처리와 간결한 흐름을 목표로 한다. 최소한의 클릭, 짧은 문구, 아이콘 중심의 화면 구성은 효율적인 사용자 경험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은 특정 사용자에게만 유리하게 작동한다.
효율을 우선한 설계는 사용자가 이미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설명을 줄이고 선택지를 단순화하는 방식은 경험이 많은 사용자에게는 편리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용자에게는 혼란을 준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현재 단계가 어디인지 파악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배제는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진다. 특정 집단을 의도적으로 제외하지 않았음에도, 설계 기준에서 벗어난 사용자는 자연스럽게 뒤처진다. 이는 접근성 기능을 추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접근성을 핵심 가치로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디지털 격차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효율이라는 기준이 설계 전반을 지배한 결과로 나타난다.
3. 디지털 격차를 줄이기 위한 설계 관점의 전환
디지털 격차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라는 인식은 해결 방향 역시 기술 개발이 아닌 설계 관점의 전환에 있음을 시사한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더 복잡한 기술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격차를 줄일 수 없다. 오히려 다양한 사용자의 상황과 능력을 전제로 한 설계가 필요하다.
설계 관점의 전환은 사용자를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특정 연령대나 숙련도를 기준으로 한 평균적인 사용자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해 수준과 경험을 가진 사용자가 공존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를 반영한 설계는 더 많은 설명, 명확한 단계 표시, 실수에 관대한 구조를 포함한다. 이는 서비스의 속도를 다소 늦출 수 있지만, 이용 가능성을 크게 넓힌다.
또한 디지털 격차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학습의 부족이 아니라 설계의 실패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디지털 격차를 줄이는 일은 특정 집단을 돕는 복지 정책이 아니라 서비스 품질을 개선하는 과정에 가깝다. 모두에게 이해하기 쉬운 설계는 결국 서비스 전체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디지털 격차는 흔히 기술 발전의 속도 차이로 설명되지만, 그 이면에는 설계 기준과 가치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기술은 중립적일 수 있지만, 설계는 언제나 선택의 결과다. 누구를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용 경험을 우선할 것인가는 사회적 결정에 가깝다. 디지털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것보다, 설계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계가 바뀌면, 같은 기술도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